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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정

추모시 - 이정록 <바가지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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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42회 작성일 11-03-0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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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 권정생

                                        




당신을 떠올리면

우물터 바가지가 생각납니다

목마를 때에는 시원한 물바가지

등목할 때에는 샘물 퍼 올리는 두레박

땀 찬 어미 소 저녁밥 내줄 때에는 여물통

개한테는 개밥그릇, 병아리 씨암탉에게는 모이통

당신을 떠올리면 못난 바가지가 떠오릅니다

마늘 생강 쪽파 다듬을 때에는 소쿠리

씨감자 놓을 때에는 마른 재 퍼오는 삼태기

닭장 토끼집 돼지우리 고칠 때에는 굽은 못 담아놓는 연장통

전쟁놀이엔 철모, 밤 호두 땅콩 깔 때엔 탄피 주워 모으던 반합뚜껑

당신을 떠올리면 우리들의 오래된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꿀 한번 담아보지 못한 꼬질꼬질한 바가지

시렁이며 벽장이며 높은 곳에는 올라가 보지 못한 바닥의 나날

깨끗한 그릇은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만 하는 억척 바가지

툭툭 발로 차이는 밑바닥의 밤낮, 보다 더 낮은 데 어디 없을까?

마루에서 토방으로 마당에서 헛간으로

끝내는, 냄새 고약한 뒷간으로 가는 바가지

어깨 들썩이며 들녘 논밭으로 소풍 가는 똥바가지

스스로 더는 낮아질 수 없어서 밀 보리 감자 고구마 배추 무

실뿌리 알뿌리로 몸과 맘 다 들이미는 똥바가지

당신을 보면 만날 일해도 바쁘기만 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못난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글 읽으며 오금 저리다면

당신의 얼굴 우러르며 마음 오그라든다면

깨진 바가지에 남의 꿀 퍼 담으려 싸우고 있기 때문이겠죠

홀로 시렁에 올라 앉아 으스대고 있기 때문이겠죠 

강아지 혀에 단물 퍼 올려주는 당신

사랑합니다 병아리 부리로 목탁을 쪼는 당신

마당일 변소일 잘 마치고 겨울 들녘에 든 당신

깊고 둥근 당신을 사랑합니다


                        -2010. 5. 17. 이정록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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