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시 - 이정록 <바가지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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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47회 작성일 11-03-03 11:06본문
바가지 권정생
당신을 떠올리면 우물터 바가지가 생각납니다 목마를 때에는 시원한 물바가지 등목할 때에는 샘물 퍼 올리는 두레박 땀 찬 어미 소 저녁밥 내줄 때에는 여물통 개한테는 개밥그릇, 병아리 씨암탉에게는 모이통 당신을 떠올리면 못난 바가지가 떠오릅니다 마늘 생강 쪽파 다듬을 때에는 소쿠리 씨감자 놓을 때에는 마른 재 퍼오는 삼태기 닭장 토끼집 돼지우리 고칠 때에는 굽은 못 담아놓는 연장통 전쟁놀이엔 철모, 밤 호두 땅콩 깔 때엔 탄피 주워 모으던 반합뚜껑 당신을 떠올리면 우리들의 오래된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꿀 한번 담아보지 못한 꼬질꼬질한 바가지 시렁이며 벽장이며 높은 곳에는 올라가 보지 못한 바닥의 나날 깨끗한 그릇은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만 하는 억척 바가지 툭툭 발로 차이는 밑바닥의 밤낮, 보다 더 낮은 데 어디 없을까? 마루에서 토방으로 마당에서 헛간으로 끝내는, 냄새 고약한 뒷간으로 가는 바가지 어깨 들썩이며 들녘 논밭으로 소풍 가는 똥바가지 스스로 더는 낮아질 수 없어서 밀 보리 감자 고구마 배추 무 실뿌리 알뿌리로 몸과 맘 다 들이미는 똥바가지 당신을 보면 만날 일해도 바쁘기만 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못난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글 읽으며 오금 저리다면 당신의 얼굴 우러르며 마음 오그라든다면 깨진 바가지에 남의 꿀 퍼 담으려 싸우고 있기 때문이겠죠 홀로 시렁에 올라 앉아 으스대고 있기 때문이겠죠 강아지 혀에 단물 퍼 올려주는 당신 사랑합니다 병아리 부리로 목탁을 쪼는 당신 마당일 변소일 잘 마치고 겨울 들녘에 든 당신 깊고 둥근 당신을 사랑합니다 -2010. 5. 17. 이정록 삼가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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