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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문학해설사 양성과정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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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태경 댓글 0건 조회 1,842회 작성일 11-12-13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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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떠나는 문학기행이라......

나에게도 드뎌 문학기행이라는 기회가 찾아 왔다.

빌뱅이 언덕에 낮고 작은 흙집에 붉은 칠 해진 스레이트 집에 살던 사람.

세상 어두운곳에 까지 환히 빛을 밝혀 준 사람.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라는 용기를 준 그 사람.

그  열아홉살의 권정생을 찾으러 부산으로 고고 씽 ! 

기훈이와 다니던 계몽서점 , 슈샤인 보이,굳세어라 금순이를 목청껏 부르던 거리.

겨울 날 명자와 장갑 한쪽식 나누어 꼈던 거리. 

4년을 살면서 청소년기의 꿈을 이룰려고, 돈 좀 벌어 보겠다고 와서 병을 얻은 곳.

그리고  짧은 동선으로 이어지는 그의 청년기의  그 곳을 상상해보며 어느새 부산 도착. 

삧 축제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우리를 유쾌하게 해 준 서 정원 시인의 안내로 여기가 거기구나 하게 해준 이모네 집 .

고가도로 앞에서 걸어 들어 갔는데 1900년 이전에는 모래 사장이었다고 한다.

판자집과 좁은길이 조금 증축 되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가기 전에는 수정동으로 알았는데 일제시대 높은 고관들이 살던 동네라 고관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모가 그런 동네에 살았다니 역시 이금이 이모는 삼밭골 컨츄리 걸 출신치고는 넘 적응이 빨랐던 것 같다. 

이순이랑 떡 장사를 할때도 야물딱 졌었고 분들네 시집살이로 빼짱마른 이순이를 보고 장득이 상투를 마구 흔들던 이금이가 아니었던가.

나무 한그루 서 있는 작은 양옥집 마당. 좁은 골목길. 장미가지가 걸쳐진 담장모습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언덕배기에 좁은 길. 많은 계단들 .

부산은 근대도시지만 옛모습 그대로, 마치 과거로 돌아 온 듯한 거리모습에  내가 공간 이동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나 요즘 자전거 타고 오르막에 오를 땐 숨이 무척 가빠. 하신 귀절이 떠 올랐다.

글로써 소통을 해서 인지 집을 엿 보는 내 마음이 짠 했다. 

그런데 권정생은 어쩌다가 결핵에 걸렸는가?  그 착한 심성으로...  마음이 불편 했을까?  얹혀 살면서 스스로 눈칫밥을 먹었을까, 아니면 밤새 책을 읽고 낮에는 재봉틀을 돌리며 허약해져 버린 것일까. 어쩌면 결핵 균이 고향에서 잠복 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들의 하느님에 서 유기농실천대회에 다녀와서 쓴 글에 보면 소년시절 부산에서 4년 동안 살았으면서 그 흔한 멍게 한 조각 먹어 보지 못 했는데 이 날  처음 멍게를 먹어 봤다 라는 귀절이 있다.   하여튼 그는 이 시절 문학적인 자양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살던 집을 벗어나자  옛 동화 미싱 앞이다.재봉틀 솜씨가 여간 맵지 않았다고 일직 주민들은 회고 한다. 그의 평소 성격을 짐작케 해 주었다.

집에서 바다가 보이는 고관동 집에서 걸어 다니셨다고 한다. 

지금은 모텔이 들어 선 골목에서 권 경옥 총무님과 장재숙 간사님이 포즈`포즈`

어쩌면 조금은 무게를 잡아야 할 답사이지만  항구도시가 주는 설레임 그리고 동지들과 궁금 했던 것들을 들으며 끄덕끄덕....

중국 사람처럼 우리 일행들은 분주하게 말을 주고  받으며 시립 중앙 박물관 수정분관을 지나 중앙 초등 분교장. 그 옆이 계몽서적이란다. 하얀 페인트 칠이 칠해진 건물이었다.

학원 이라는 잡지를 빌려 옆구리에 찔러 넣고 기훈이와 젊음에 취했을 모습이 어린다.

큰 길로 나서자  권 정생이 신장 제거 수술을 받았던 성 분도 병원.

수술이 덧나서 다시 부산 대학 병원으로 재수술 하기도 하셨다. 

그 곳에서 평생 그의 발목을 잡은 방광 제거 수술 .이것도 운명이었을가.

지금은 폐쇄되어 색 바랜 훌라후프와 낙엽이 뒹글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지만 병원 규모는 꽤 커 보였다. 

우리가 안 상학 시인의 설명을 받아 적으며 디카를 들이대는 모습에 지나가는 행인이 나에게 묻는다.

 내가 제일 호락호락 해 보였남. 강아지 똥 이라는 동화를 쓰신 권 정생동화작가가 젊어서 수술 받던 곳이라 답사 중입니다 했다. 그는 권 정생을 모르는 듯 휙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이 되받아져 나왔다.

권 정생선생님 뒤끗발 따라 올 위인이 없심데이라고

그리고 도로를 건너고 하면서 성경책을 선물로 주고 간  명자가 다니던 삼일 교회가 나왔다.

무척 크고 잘 차려진 교회였는데 조금 뒷 터에서 증축해 나왔다고 한다.

권 정생은 부산에서 교회도 하느님도 멀리 했지만 친구가 있었다.

친구들의 가여운 운명에 가슴 메였다는 권 정생. 메리놀 병원은 지금의 카톨릭 센터였다.

몽실이가 죽어 가는 아버지에게 구걸 해 온 밥을 나누어 먹으며 길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던곳. 

그 길이랑 담벼락이 그대로 있어 우리는  그날의 몽실이로 돌아가 길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몽실이 기분이 되어 보려고 우린 감정 몰입 까지 했다.

그 와중에  점심으로 맛 나게 먹은 갈치조림으로 내 배는 불렀고 날은 겨울 답지않게 따따부리 했고 언덕과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종아리는 땡겨 왔다.

그러나 곧 칡줄기가 말라 붙은 담벼락에 서서 앞 뒤로 신음하는 병자들 틈에서 어린 몽실이가 감당해 내어야했을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아.나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응급실에 이렇게 있어 보았지 그때....

겨울 비 맞으며 아버지와 달랑 의지하던 모습이 떠 올랐다. 

뒷 구멍으로 진찰권을 받아내는 사람들 틈 새에서 난남이를 걱정해야하고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다. 권 정생의 문학은 경험 그 자체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눈물이 투두둑 떨어지는 것이다. 글 속에 진심이 있고 온 정이 있다.그것은 권 정생이다.

 하고 싶은 공부도 ,돈도 벌지 못하고 몸만 병이 난 채로 1957년  아버지의 고향 일직으로 돌아온다. 1964년  권 정생에게 먹이려고 산과 들의 약초와 개구리를 먹이시고 새끼줄로 허리를 졸라매고 일 하러 나가시던 어머니가 돌아 가신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 평생 더욱 더 죄스런 마음을 안고 사신 것 같다.

그  자식을 사랑하던 그 어머니의 몸과 마음. 자기는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않을 지언정  새끼를 위해 죽어서도 보금자리가 되어준 엄마 까투리가 탄생 된것이다.

하루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부산이 주는 푸근함.그의 청년기를 둘러 보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  보게 된 기행이었다. 

대한 민국 사람중에 그 중에서도 아이와 엄마라면 권 정생은 몰라도 강아지 똥 하면 아`하며 다 안다.

어두운 곳에 희망을, 하찮게 여기던 미물에게도 생명을 불어넣고 간  사람 권. 정.생.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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