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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권정생 어머니의 수년간 행상 고생은 물거품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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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람 댓글 0건 조회 579회 작성일 19-11-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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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친미 종속과 대미 의존 경제의 시작 '적산'

  

'적산'은 일제 패망 이후 총독부 각 기관과 일본인이 남기고 떠난 재산(동산,부동산)을 말한다.

8.15 당시 적산의 규모는 주식회사 자본 총계의 91.2%, 공업투자액의 94%, 토지 총면적의 70%,

경지면적의 28.4%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중 경지면적의 적산이 적은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인 친일 지주들에게 비교적 헐값으로 쉽게

처분하고 떠날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산'은 마땅히 해방조선의 미래를 위하여 민족자립경제의 토대로 사용되어야 했다.(북한에 적용)

그러나 노동자의 자주 관리와 농민의 자발적인 토지개혁 움직임을 억누르고 포고령 2호(1945.9.7)로

적산을 장악한 미군은 이를 과거의 친일파나 새로 형성된 친미파에게 헐값으로 넘겨버렸다.

(일부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불하)

당시 적산의 불하 가격은 시가의 10분의 1에 불과 하였고, 이마저도 자금융자, 세금 감면등 여러가지 특혜를

제공하였으며, 적산 불하 대금은 15년간 분할 상환하게 하였다.

이는 당시의 높은 인플레를 감안 하면 거의 공짜로 넘겨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방직 대구 공장의 경우 1947년 시세가 30억 환이었는데 미군은 해방 전 시세인 7억환으로 매기고

이를 3억 6000만 환에 넘기고 15년 분할상환의 특혜를 주었다. - 삼성과 관련 기업

15년 후인 1961년 물가는 1947년에 비해 300배 올랐기에 사실상 12만 환에 넘긴것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 대기업과 자산가들은 이렇게 민족의 자산을 가로채 부를 일구었던 것이다.   

 

'원조'

원조 역시 남한 경제를 대미 의존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미국은 1945~1961 사이 미국의 잉여농산품과 소비재인 밀가루, 면화, 설탕, 보리, 쌀, 시멘트 등을 

(총31억달러) 원조하였는데 이러한 원조품이 쏟아져 들어오자 해당 분야 국내산업은 치명타를 입었다.

밀가루의 경우 국내 밀 농사가 거의 없어졌고 전국 300여 개이던 제분소는 거의 몰락하였다. 

대신 원조 밀을 가공해 팔던 대한제분, 풍국제분(대선제분), 조선제분(동아원)이 시장을 장악하였고

이들은 미국의 원조에 기생해 급성장 하였다. 

한편 미국에 의한 38선의 확정은 남북의 경제적 보완 관계를 파괴하여 북한에는 상시적 기아를,

남한에는 대외 의존성을 심화하였고 민족경제의 토대를 파괴하였다.

 

1953년 2월17일 단행된 2차 화폐개혁

권정생 선생 어머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게 한 화폐개혁이다.

전쟁중 무분별한 화페발행으로 치솟은 인플레를 해결하기 위한 화폐개혁이었다.  

1950년의 화폐개혁은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1:1 바꾼것이지만 1953년의 화폐개혁은

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고 구화폐와 신화폐가 100:1로 교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화폐개혁은 적산 불하의 혜택을 입은 토지등 자산소유자, 부채가 많았던 기업가에겐 엄청난 이득이었지만

권정생 선생의 어머니와 같은 민초들에게는 끝모를 고통과 희생을 가져 온 무책임한 정책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 남쪽에서 정상적인 적산의 처리가 이루어지고, 토지개혁 등 민주적이고 공정한 농정이

이루어 졌다면 해방이후 극심한 기근과 정치적 혼란은 없었을 것이었다. 

 

결국 선생님은 오늘도 우리를 깨우치신다.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천사인가?,

아니면 우리의 마지막 남은 살점에도 탐욕의 침을 흘리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인가?.

스스로 일어서지 않는 민족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친절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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