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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재 하늘'에서 이순이네가 도망갔던 '우구치'를 찾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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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람 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19-11-1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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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소설 '한티재 하늘'에서

1930년 음력 칠월에 장득이의 노름빛으로 인해 집달리들이 집안 살림 구석구석에 빨간 딱지를 붙입니다.

장득이가 잡혀갈까 겁이난 분들네와 이순이네가 한 밤중에 야반도주를 합니다. 

이순이네는 딱지가 붙지 않은 애지중지하던 팔십원하는 황소를 오십원에 팔아서 맨몸으로 정처없이 북으로,

분들네는 그나마 집안 살림을 챙겨 새끼밴 암소에 얹고 재득이, 수득이와 남으로 못골(의성 안평) 말숙이네로 길을 떠납니다.

'이순이는 다섯달이 조금 넘은 뱃속애기(차옥)를 품고 등에는 세 살배기 순옥이를 업었다. 다섯살짜리 지복이는 장득이가 업고

여섯 식구가 정처없이 떠납니다'(수복, 재복 포함)

돌음바우골을 떠난지 한 달이 지난 가을에서야 경상도와 강원도의 경계지점인 봉화 춘양 우구치에 닿습니다. 수중에는

겨우 10원이 남았죠.

아마 당시에는 지금의 도로가 없었으니 낙동강을 따라 안동에서 청량산을 지나 현동 고개를 넘어 춘양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우구치는 춘양에서도 태백산 사고가 있는 각화사도심을 지나고, 서벽(지금 백두대간 수목원이 위치)을 지나, 태백산맥의

줄기에 위치한 도래기재를 넘어 있습니다.   

아름들이 소나무, 참나무들이 빽빽했고, 오리·십리에 한 집씩 있었던 골짜기의 제일 막장 이었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서벽에서 80년대에 중학교를 다닌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정 사는 학생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모두 학교에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버스가 없으면 걸어서는 돌아 갈수가 없었음을 선생님들도 이해하였기에 학교에서 배려를 했다는 말입니다.

정말 골짜기였습니다. 춘양에서 사십리가 아니라 서벽에서 사십리가 아닐까 싶더군요.   

한때 금광이 발견되어 번성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여름농사철에만 잠시 기거하는 농막같은 빈집이 골짜기 입구에 서너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순이를 생각하며 산길을 좀 걸어보려 했지만 너무 외지고 인적이라고는 없어 대충 둘러 보기만 하고 그냥 돌아 왔습니다.

소설속에서 호랑이가 집 앞까지 와서 울었다는게 실감이 났습니다.

(한국의 호랑이는 1908년 불갑산에서 잡힌 호랑이가 박제로 목포 유달 초등학교에 남아있고,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마지막

호랑이가 잡혔다고 합니다만, 사실 호랑이는 제발로 백두대간을 타고 한반도를 드나 들었다는게 맞을 겁니다.)    

지금 백두대간 수목원에 호랑이를 방사하고 있다니 아마 고요한 밤중이면 그 포효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 중순 눈이 내리고 아이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이순이는 다시 돌아와 동생 이금이가 시집가 살고 있던

효부골(안동 하회마을 옆 동네)에  잠시 자리를 잡습니다.

 

각화사 입구에 송덕비가 하나 서있는데 내용은 1920년대 군수가 매년 세금으로 닥나무 내는 것을 중지해 준 것에 대한 

송덕비였습니다. 해마다 닥나무 세금이 얼마나 고통이었으면 송덕비까지 세웠을까요.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고난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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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리, 물미(물이 만나다는 뜻), 쑥댕이, 애당, 대티(큰고개), 새터, 어디골, 부채뜰마을, 돌고개마을, 아드뱅이 등이 우구치 가는 길에

만나는 지명입니다. 순 우리말의 지명들 입니다. 

백두대간 수목원이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함께 둘러 본다면 아마 이순이의 고난했던 여정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는

좋은 여행이 될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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