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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최선생'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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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람 댓글 0건 조회 562회 작성일 19-11-0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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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작품에 등장하는 ‘최선생’을 기억하며

 

조 한 웅 기록

1928년 ∙ 일직(조탑)에서 경주 최 씨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남.

           ∙ 본명은 ‘최용복’ (나머지 누나와 여동생은 남희, 월희, 금희, 분희) 

           ∙ 할아버지가 개화기 근동에서 소문난 거상으로 일제 말 혹독한 공출에도 늘 인삼을 끊이지 않고 

              먹었을 정도였으며 부친이 신식교육에 일찍 눈을 뜸.

1938년 ∙ 4월 소학교를 마친 후 여동생과 경성으로 유학하여 당시 최신,최고의 기술이었던 전기학교에 입학 함.

             떠나던 날 운산역에 교장을 비롯한 전교생이 환송을 나왔을 정도로 읍내에서도 드물었던 큰 화제 거리였음. 

1938~1946년

           ∙ 4년제였던 경성전기학교를 다님. 자취하며 다니던 중 화로불 가스에 중독되어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음. 재학 중 비밀리에 지하 반일 좌익활동을 하였음.

1946년 ∙ 해방 후 외동아들을 걱정한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에 돌아옴.

1947년 ∙ 20세 때 1살 연상인 의성 옥산 한약방집 맏딸과 혼인.

1948년 ∙ 해방되고 일본인 교사들이 귀국하자 부족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안동사범학교 강습과를 거쳐

              1948년 8월부터 일직공립국민학교 교사로 근무.

1948년~1950년.6

          ∙ 일제 잔재와 봉건 계급사회를 청산한 평등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당시 친일 자본가의

            매점매석과 미군정의 실정으로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는 동네 주민들을 위해 가산을 털어 이웃들에게

            죽을 쑤어 함께 나누어 먹었고, 정성으로 수업하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

          ∙ 소년 권정생과 한 마을 이웃에 살며 함께 학교를 다녔고, 또래보다 나이가 많았고 일본어에 능숙했던

            권정생을 특별히 아꼈으며 많은 영향을 주었음.  

1950년 ∙ 6·25가 발발하자 일직면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였고 전세가 악화되자 10월 예천에 있는 삼촌에게 가 있으라는

             부친의 말을 뒤로 하고 면장, 우체국장 아들 등 동료 6명과 함께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떠남.

           ∙ 남았던 동지들은 암산 골짜기, 일직 수재골 등에서 군경에게 대부분 죽임을 당했음.

           ∙ 2004년 적십자사를 통해 생존이 확인 되었으며 이산가족 만남에서 함께 월북한 동향인 6명 중 1명도 생존해

             있음을 알렸으나 남측 가족이 만남을 거부 함.        

           ∙ 고향을 떠날 당시 아들은 세살, 딸은 생후 6개월 이었음.

           ∙ 권정생동화나라에 전시된 일직국민학교 학적부에 권정생 선생의 4학년 담임이 '최교사' 로 기록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월북 후 그의 기록을 모두 지웠음.     

1950. 9~ 1960년

           ∙ 그가 떠난 후 남쪽에 남겨진 가족에게 수시로 경찰이 찾아와 숨겨둔 무기를 내 놓으라며 뭇매를 때리고

             행패를 부려 남은 가족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음. 

1956년 ∙ 분단이 고착화 되고 통일이 멀어지자 그는 평양에서 주변의 권유로 교사였던 ‘리관력’과 재혼

           ∙ 북에서 7남매를 출생했으나 전후의 열악했던 의료 사정으로 5명만 생존.

              (북측 자식들이 과학자, 운전수, 노동자로 일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였음)

           ∙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복무.

2004년 ∙ 9차 이산가족상봉때 북측 부인의 신청으로 남한 가족에게 그의 생존이 확인 되었음.

             78세에 남쪽 가족을 55년 만에 만남.

           ∙ 북측 부인이 이산가족 면회때 남측 가족을 위하여 비로드 옷감, 인삼주, 담배 등을 정성껏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고 함.     

           ∙ 남측 부인 '옥산댁'은 불과 2년의 신혼기억을 안고 55년을 기다려 남편을 만났으나, 만남의 기쁨도 잠시 5년

             만에 쓸쓸히 세상을 떠남.

           · 연좌제로 인한 제약의 사슬에 갇혔 힘들어했던 아들은 세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아픔만

              남긴 채 일찍 세상을 떠남. 

           · 헤어질 때 6개월 이었던 딸은 55년만에 아버지를 만나 품에 안겨 설움의 눈물을 흘렸고,

              남편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 절을 아버지께 드렸음.. 

∙ 2004년 이산가족 만남 당시 사진을 보면 귀티 어렸던 어린 시절의 앳된 얼굴은 세월의 흔적에 찾을 수 없었지만 힘찬

  눈빛과 꽉 다문 입매에는 78세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념과 의지가 그대로 엿보임. 

∙ 권정생 선생의 작품에 '최선생'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가 바로 ‘최용복 선생’이며, 권정생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  수록된 '할매 얼굴'은 분단으로 인해 남쪽에 남겨진 최선생 부인과 손자의 이야기를 쓴 글임.  

∙ 2004년 이산가족 만남 때 권정생선생이 여비 10만원을 보태 준 것을 듣고 ‘제자 권정생에게’ 라는 짧은 편지를 가족편에

  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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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주체사상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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