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추모의 정

弔辭 - 김용락(시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18회 작성일 11-02-25 09:45

본문

권정생 선생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언제까지나 저희 곁에 계실 것 같았던 권정생 선생님께서 기어이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 동시집 제목처럼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 가셨습니다. “배고프셨던 어머니/추우셨던 어머니/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을 사셨던 “팔이 여위셔서/물동이 내리실 때 부들부들 떨지 않으실까”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 가고/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어머니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권정생 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중) 했던 바람대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아마 선생님이 그렇게 못 잊어 한 목생(木生)이 형도 함께 하면 더욱 좋겠지요. 전신 폐결핵이 걸려 동생 혼사에 걸림돌이 될까봐 혼사 끝날 때까지 잠시 좀 나가있으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와 떠 돈지지 70 평생 드디어 어머니 곁으로 가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집 나와 안동읍내에 있는 잡곡가게 점원으로 취직하셨지요. 가게 주인이 고구마를 저울에 달아 줄 때 손님 몰래 한 두 개씩 슬쩍 빼내, 저울 눈금 속이는 것을 보고 괴로워 하다가 새경도 안 받고 가게를 그만 두었다지요. 그길로 부산 가서 책가게 점원도 하고 전국을 떠돌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셨지요. 그래서 가끔씩 “나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서 독하다. 나도 공부 조금만 더 했으면 지금과는 달리 살았을 텐데,  몸 안 아프고 하루라도 살아봤으면...”라는 말씀도 회한처럼 하시곤 했지요. 일직초등 6년이 전부인 학력 때문인지, 가끔은 “봉화 전(우익) 선생님이 고등학교 때 꼬바리(꼴찌) 해서 낙제 했단다.” 하시곤 유쾌해 하시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의지하셨던 봉화 전 선생님도 그곳에 계시고, 선생님의 든든한 후원자이셨던 이오덕 선생님도 그곳에 계시고, 효선리 김(영원) 장로님도 그곳에 계시니까 별로 외롭지는 않으시겠네요. 이것도 축하해야 할 일인가요.

  80년 광주사태가 나고 대학이 휴교를 한 5월 어느날 처음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내 고향 단촌과 일직 조탑리는 승용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요. 그때는 아마 자전거를 타고 갔지요. 일직교회 문간 방, 문지방 보다 방이 한 자 이상 낮아 보이던 어두컴컴한 방 실겅대 위의 낡은 이불이 기억납니다. 후지카 석유곤로와 그을음이 잔득 묻은 냄비, 벽지를 바르지 않은 세사벽, 부피가 두껍던 일본어문학전집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생쥐와 개구리가 선생님의 친구들이었지요.

  제가 당시 빠져있던 랭보같은 외국 시인과 국내 서정시인에 대해 이야기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게 문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시며 광주사태의 진실과 농민운동으로 구속됐다 막 풀려난 안동가톨릭농민회 정재돈 총무를 만나보라고 일러 주셨지요. 그게 저에게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내 문학의 지침을 돌려놓은 운명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안동공고 교사로 발령받아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안동에서 보낸 3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습니다. 권정생 선생님, 전우익 선생님, 이오덕 선생님, 정호경 신부님과 그 밖의 훌륭한 안동의 선후배들이 어울려 목성동 성당이나 문화회관에서 영화를 보고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해 토론하던 그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도 많은 것을 주셨지요. 제 첫 시집『푸른별』 발문을 쓰면서 처음 써 보는 것이라면서 망설이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고, 첫 딸아이 이름을 손수 지어주고 그 이름을 등장인물로 하는 동화까지 써 주시면서 딸애를 격려하던 모습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작은 딸애는 앞으로 세뱃돈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더군요. 저희 가족이 세배를 가면 세뱃돈으로 각자에게 1만원 씩 주셨지요. 그렇게 받기만 하다가 선생님이 일흔 살이 되던 지난해부터인가요 지금부터는 제가 드리겠다고 세뱃돈을 드렸더니 아주 민망해 하면서 받으셨지요.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의 부탁을 받고 산문집 「하느님의 눈물」원고 모을 때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원고를 제대로 보관하지 않기로 유명하지요. 책 내지 않겠다는 선생님을 설득하느라 제가 꽤 잔소리를 들었지요. 책 서문에 ‘김용락 군’ 이라고 표현해 나이 마흔 넘은 사람이 군이라는 소리 듣는다고 제 주의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놀렸습니다. 27년 간 선생님을 모시고 겪은 이런 이야기는 한정 없겠군요.

  지난 4월 2일 보름 전부터 1주일 간 소변에 피가 쏟아져 나오고, 숨이 가쁘고 통증이 온다고 119 구급차 타고 대구 가톨릭병원에 입원해 열하루를 보내고 퇴원하셨지요. 제가 병실에 막 들어가니 선생님은 아주 힘든 표정으로 지쳐 누워계셨고, 간병사가 어떤 관계이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엉겁결에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잠깐 묘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뭔가 안도하는 듯 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멀리 내다보이던 두류산공원의 활짝 핀 벚꽃을 보고는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 도시 사람 정말 불쌍타 그지? 저런걸 보고 조타카이. 우리 집에는 지금 명자꽃이 얼마나 붉게 피고 앵두꽃이 필 텐데...” 하시면서 빨리 퇴원하시고 싶어 했지요.

  간병사가 선생님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 “(기독교) 믿음 생활 하는가보죠?”라고 묻자 곧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과 목사님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따금이 아니라 자주 어긋나 낭패”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줄 만큼 준다고 했는데 요즘 교회는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게 탈”이라고 말씀해서 간병사아주머니를 무안하게 만들고는 미안해 하셨지요.

  사실 선생님은 자주 미국의 횡포와 미국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 부시 미대통령의 폭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셨지요. 아울러 북녘 동포들의 어려움에 대해, 특히 중국 국경 주변을 떠도는 북녘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많이 안타까워 하셨지요. 만났다하면 북녘이야기를 해서 불경스럽게도 저는 속으로 “또 그 이야기... ” 하면서 속으로 지겨워 한 적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80년대, 엄혹했던 그 시기에는 어두컴컴한 선생님의 작은 방안에서 봉화 전 선생님과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북쪽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지요. 그런 이야기들이「몽실언니」「점득이네」「초가집이 있던 마을」「한티재 하늘」의 통일 정신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애정으로 연결되고, 오늘날 우리사회에 통일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했지요. 마침 선생님께서 가시는 날이 57년 만에 역사적인 남북 철로가 개통되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갈 때 경의선과 동해선이 개통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며 또 뭐라고 논평했겠지요.

  퇴원하고 나서 제가 조탑리 오두막으로 찾아뵙자 여느 때와는 달리 세 시간이나 저를 붙잡고 많은 말씀을 하셨지요. “이번에 병원 가서 죽어 나와야 되는데 내가 모질어서 그냥 살아 나왔다.” 식사하셨냐고 여쭙자 “나는 인간이 모질어서 그렇게 아파도 뻘뻘 기서라도 밥 해 먹었다.”고 죽지 않고 퇴원한 선생님 자신이 모질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하셨지요.

  입원 소감을 묻자 “앞으로는 머리 좋고, 건강하고, 잘 생긴 사람만 대우 받고 살겠더라. 병원이 마치 SF 소설 속같이 기괴하더라.”라며 머리 좋은 의사들의 불친절과 권위주의에 대해 불편해 하셨다. 과장이라는 의사는 치료를 하면서 전화가 오자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끼워 정신없이 지껄이면서 선생님 몸 치료는 대충대충 하더라면서, 인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의료시스템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면서 저 보고 “용락아, 니는 서울대생 가르치지 말고 머리 나쁜 아이들 가르쳐라”고 말씀 하셨지요.

  제가 입원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라고 묻자 “나한테도 그 정도 돈은 있다. 열하루 입원비가 400만원인데 보험료 빼니까 200만원 나오더라. 보험 없으면 한 달에 1000만원 넘게 나오니, 병원비 너무 비싸 가난한 사람은 병원에도 못 가고 가도 제대로 대접도 못 받겠더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다음에는 제가 치료비를 좀 댈게요.”했더니 “니는 이제 대학 교수 돼서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면서 웃으셨지요. 그걸 기억하셨는지 두 번째 병원에 와서 예상보다 치료범위가 넓어지자 “다른 사람에게는 연락하지 말고 용락이에게만 연락하라” 하셨다지요. 입원 사실을 알면 또 많은 분들이 문병 오게 되니까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기 싫으시고, 제가 병원 가까운 대구에 살고 치료비 변통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셨는지요. 그러나 선생님 결국 그 치료비를 내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멀리 떠나보냅니다.

  선생님 가시고 윗도리를 살폈더니 ‘나눔과 섬김’이란 문구가 쓰인 재활용 편지봉투에 32만 2520원이(만원권 30매, 5천원권 3매, 천원권 7매, 500원 동전 1개 10원짜리 2개) 댕그라니 남았더군요. 아마 선생님이 평소 갖고 계신 돈의 전부이겠지요.

  “내가 만약 건강한 여자라면 자원해서 1년간 간병사가 돼 보겠더라. 병원에서 다 볼 수 있겠더라. 온갖 인생, 사회현상, 교통사고, 화상, 깡패, 가족사 이혼 등이 다 병원 안에서 펼쳐지더라. 책 10권은 쓸 수 있는 소재거리가 있더라.”라고 말씀하셨지요. 병실에서도 글 쓸 거리를 생각하시는 것을 보니 선생님은 천상 문인이었던 모양입니다. 「몽실언니」에서 이념을 뛰어넘는 휴머니즘을,「강아지 똥」에서 버려진 것들과 생명, 평화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셨지요. 아동문학평론가 이오덕 선생님은 선생님을 가리켜 이원수 이래 한국 최고의 사실주의아동문학가라고 평하셨지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에 대한 여러 분들의 평가가 생각납니다. 전우익 선생님은 “권 샘은 독하다 독해”라고 하시고, 이오덕 선생님은 “권정생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하시고 염무웅 선생님은 “온갖 더러운 세속의 수렁 속에서 피어난 고귀한 연꽃 같은 분”이라 하시고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사모님인 김태언 교수는 “예수가 재림한 게 아닐까 생각 되는 분”이라고 하셨지요.

  2007년 5월 17일 오전 10시 40분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상학 시인이 서울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권 선생님이 위독하니까 빨리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11시 10분이었지요. 전날 재진 검사를 받기 위해 안동에서 대구 가톨릭병원까지 선생님을 모셔온 안동시민연대의 최윤환 선배가 침통한 얼굴로 침상 머리에 서 계셨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한 채이기는 하지만 의식이 있었고, 매우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계셨지요. 제가 “선생님 용락이가 왔는데요. 알아보시겠어요?” 여쭙자 고통스런 표정으로 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뭔가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제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뭔가 쓰시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알아먹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곧 깨어나실 줄만 알았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12시 30분 경, 의사의 진단은 혈압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고 심장 혈압 강화제를 투약했지만 효과가 없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호흡이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담당 의사도 두세 시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내렸습니다.

  오후 1시가 되자 잦아들었던 선생님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고, 두 팔을 움직이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지만 허사였지요. 선생님의 두 눈이 서서히 감기고, 귀 밑 부분과 머리 정수리부분에서부터 점차 보랏빛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선생님을 덮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물의 양은 적어서 밖으로 눈 밖으로 많이 흘러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선생님 두 눈에는 두어 차례 눈물이 고였지만 밖으로 흘러내리지는 않았습니다. 1시 30분경, 선생님은 산소호흡기의 고무 호수가 꽂힌 입을 움직여 무언가 맹렬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입모양을 보고 그게 ‘어매(엄마)’ 라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매’ 소리를 2, 3분간 안간힘을 쓰면서 지르시더니 더 이상 입모양이 움 직이지 않았습니다.

  1시 49분 드디어 마지막 심폐소생술을 시도 했습니다. 건장한 남자간호사 두 사람이 둘러붙어 선생님의 가슴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종래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2시 17분 드디어 담당의사가 보호자를 불렀습니다. 제가 곁에 있던 최 선배를 불렀습니다. 의사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사망 선고를 해야 되겠다고 저희에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젊은 의사는 응급실 천장을 쳐다보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2007년 5월 17일 오후 2시 17분 사망” 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몸과 입에 꽂힌 고무 호수와 측정기기들을 제거 했습니다. 곧이어 수학여행을 중도에 마치고 돌아온 조영옥 선생님이 응급실이 떠나가도록 “선생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15일 스승의 날 아침에 전화를 드렸더니 목소리가 너무 탁해서 지난밤에 많이 앓으셨냐고 여쭈었더니 평소 같으면 으레 괜찮다고 하실 텐데 그날은 “지난밤에 많이 아팠다. 이제는 죽어도 돼”라고 말씀하셔서 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가셨습니다. 그러나 남은 우리는 선생님이 남기신 뜻이 무엇인지 새기면서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어머니 계시는 그 나라에’서 전쟁과 폭력, 가난과 소외, 질병의 고통 없는 그 나라에서 편히 쉬 쉽시오.

 

                                                                                         2007. 5. 20   김용락 삼가 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