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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정

추모의 편지 - 박기범(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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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18회 작성일 11-03-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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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한 해가 지났다는 게 잘 실감이 되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빌뱅이 언덕을 보며 마을 고샅을 오르면 저 툇문을 열고 구부정 허리를 굽히며 내다보실 것만 같아. 그러고는 살짝 못마땅한 기색으로 댓돌 아래로 내려설 것만 같아. 어쩌면 몸이 너무 힘들어 온 길 그대로 돌아가 달라 바로 등을 보이실 지도 모르겠고요. 하늘로 선생님을 돌려드리고 난 뒤 네 번의 철이 바뀌었고, 그 사이에도 몇 차례 이 언덕 오두막을 찾았지만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 뜰에 있는 앵두나무, 산수유, 느티나무 모두가 그대로이고, 할아버지 정성껏 줄을 잡아 놓은 작은 포도나무도 그대로, 저 앞에 이끼 같은 버섯을 더덕더덕 입고 있는 바윗돌도, 이 마당가를 떠나지 않고 바삐 종종거리는 새들도 다 그대로인데 바뀐 거라고는 단 하나, 이곳에는 선생님이 이제 계시질 않아. 문고리에 걸린 자물통만 부질없이 만져보곤 했습니다.

 

 오늘은 여럿이 모여 선생님을 기억하느라, 하늘에 계신 선생님을 불러내 만나고 싶어 이 자리를 함께 찾았어요. 아마 선생님 보고 계시면 또 언짢은 낯으로 뭐 한다고 이래 모였나 하실지 모르겠어요. 살아계실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조심스러운 마음은 여전하거든요. 그치만 너무 노여워는 마세요. 저희가 이 자리를 찾은 건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어서 번잡스런 자리를 만들고 벌리려 해서가 아니라 선생님께 살짝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인 걸요.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분들이거나 아님 지금 어디에선가 하늘을 올려다 봐 선생님을 그리는 분들 모두 그 가슴마다에는 아마 선생님과 나누는 자기만의 이야기들이 있을 거예요. 선생님의 삶과 말씀, 선생님이 그리워한 세상, 선생님이 슬퍼하고 꾸짖던 것들 그리고 선생님이 사랑한 작고 힘없는 목숨들……. 아직도 저희는 더 가난해지지 못했고, 더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사랑을 배우지 못했고, 내 몸과 삶이 평화가 흐르는 길이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은 선생님을 떠올리거나 이 오두막을 찾으면서도 마냥 그립고 반갑지만은 않아요. 늘 마음 한 켠에는 그만큼의 부끄러움과 떳떳치 못한 괴로움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이 있어 이나마 마음 더 흐트러지지 않게 다잡으려 할 수 있었고, 삶이 더 엇나가지 않게 붙잡을 수 있었는지 몰라요. 글쎄요, 오늘 선생님을 마음으로 불러 떠올리는 이들에게 선생님은 어떤 말씀들을 들려주고 계실까요.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 떠올리는 일이 적어도 선생님의 삶을 칭송하는 말만을 늘리는 일이 되게 하지는 않을게요. 마치 그 어느 분 앞에서 회개하고 참회하고는 돌아서서 맨 똑같은 삶을 살고 마는 그런 어리석음으로 선생님을 기억하지는 않을게요. 그저 몇 자락 되지 않는 선생님과의 추억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걸어 그대로 보여준 삶을 닮아가는 것으로 선생님을 기억할게요.

 

 힘없고 가녀린 목숨들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슬픈 세상이기는 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어머니 곁에서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신 선생님 얼굴 떠올릴게요. 기쁘고 행복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2008. 5. 17 박기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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