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문학과 삶

세상 모든 강아지똥에게 민들레 씨를 . .

연보 및 사진
1937년
(1살)
8월 18일, 일본 도쿄 시부야 하타가야 혼마치 헌옷장 수집 뒷방에서, 아버지 권유술과 어머니 안귀순 사이에서 5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경수’라고 불렀다.
1938년
(2살)
7월 5일, 홀로 고국에 남겨진 둘째형 목생이 죽는다. 첫돌도 안 된 권정생은 이때부터 자장가 대신 어머니의 슬픔이 그대로 담긴 구슬픈 타령을 듣고 자란다.
1941년
(5살)
누나에게 처음 예수 이야기를 듣는다. 평생 예수를 믿고 살았다.
1943년
(7살)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쌓아둔 <이솝이야기>. <그림동화집>,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오가와미메이의 <빨간 양초와 인어> 같은 동화책과 그림책을 읽으며 글자를 익혔다. 동화 <슬픈 나막신>은 이 무렵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다.
1944년
(8살)
혼마치 소학교에 입학해 8개월을 다닌다. 12월, 미군의 폭격으로 집이 불타 없어져 군마켄 츠마고이라는 시골로 간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군마켄 우에하라 소학교에 6개월을 다닌다.
1945년
(9살)
해방 후 후지오카로 이사한다. 노동자들의 간이식당인 함바집을 하던 큰형은 총련계와 가까워지고 셋째 형과 함께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한다.
1946년
(10살)
봄(3~4월)에 두 형만 일본에 남고 귀국하였지만 갈곳이 없어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권정생과 어머니, 큰누나, 동생은 청송 외가로 갔다. 청송 화목국민학교를 5개월 다녔다. 이때 청송에서 보고 겪은 이야기를 쓴 동화가 <쌀 도둑>이다.
1947년
(11살)
12월, 흩어졌던 식구들이 안동 일직면 조탑리에 모였다. 농막에 살며 소작 농사를 지었다.
1948년
(12살)
3월 20일, 동생과 함께 안동 일직초등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한다. 어머니가 행상을 시작하여, 권정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을 짓고 살림을 했다.
1950년
(14살)
6.25 전쟁 때 대구까지 피난을 갔다 돌아왔다. 화폐 개혁으로 돈 가치가 100분의 1로 떨어져 소 세 마리를 살 수 있게 어머니가 모은 돈이 염소새끼 한 마리도 살 수 없게 되었다.
1953년
(17살)
3월 23일, 일직초등학교 제30회 졸업식에서 전교 1등을 하였다. 1년 동안 돈을 모아 중학교에 가기로 하고 나무를 해다 팔아 암탉을 사서 키웠다. 백 마리가 훨씬 넘었지만 전쟁 때문에 전염병이 덮쳐 모두 죽었다. 여름부터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를 했다. 겨울, 고학을 해서라도 중학교에 갈 생각에 부산으로 떠났다.
1955년
(19살)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했다. 헌 책방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죄와 벌>, <레미제라블>, 월간잡지 <학원>등을 사서 읽었고, 포장지를 모아 글을 썼다. 부산에서 만난 친구 오기훈과 최명자를 생각하며 <갑돌이와 갑순이>란 동화를 썼다. 이 동화는 <별똥별>로 발표되었다. 결핵을 앓기 시작한다. 1년을 혼자 버티다 끝내 늑막염에 폐결핵이 겹쳤다.
1957년
(21살)
2월, 집 떠난 지 5년 만에 어머니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통증과 소변보는 횟수가 잦아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1958년
(22살)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어머니는 약초를 캐고 메뚜기, 뱀, 개구리를 잡아 먹이며 병간호를 했고 틈틈이 저수지 공사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식구들의 고생과 병마가 괴로워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밤마다 교회에 나가 눈물로 기도했다.
1964년
(28살)
병세가 차츰 호전되었다. 1월 10일, 초등학교 시절부터 틈틈이 써두었던 동시 98편을 모아 <동시 삼베 치마>라는 동시집을 손수 만든다. 늦가을, 어머니가 쓰러진다.
1965년
(29살)
어머니가 누운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다. 동생을 결혼시켜 가계를 잇게 하려고 아버지가 어디 좀 있다 오라하여, 4월 중순 집을 나와 기도원에 잠시 머물다 3개월 남짓 대구, 김천, 상주, 점촌, 문경등지를 거지로 떠돈다. 거지 생활 3개월 만에 부고환결핵까지 앓게 되었다. 12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966년
(30살)
6월, 일본에 사는 셋째 형이 돈을 보내줘 부산 성분도병원에서 한쪽 콩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였고, 12월 30일, 부산대학병원에서 방광을 들어내고 소변 주머니를 다는 재수술을 받았다. 퇴원할 때 의사는 2년, 간호원은 6개월도 못 살 것이라고 했다.
1968년
(32살)
동생이 결혼해서 나가고, 일직교회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나았다.
1969년
(33살)
월간 《기독교교육》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 현상모집에서 <강아지똥>이 당선되었다. 상금 1만원을 받아서 반은 새끼 염소 한 쌍을 사고, 나머지로는 쌀 한 말을 산 다음 조금씩 썼다.
1971년
(35살)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가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9월 16일 창립된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약칭, 안동문협)에 이오덕과 함께 아동문학부분 창립회원이 되었다.
1973년
(37살)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 동화를 읽고 이오덕이 권정생을 찾아가 처음 만났다. 그 해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 가입한다.
1974년
(38살)
8월에 첫 동화집 《강아지똥》(세종출판사)을 펴냈다.
1975년
(39살)
동화 <금복이네 자두나무>로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서 제정한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시상식에는 검정 골덴 바지와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갔다.
1978년
(42살)
《소년》 1월호에 《초가집이 있던 마을》연재를 시작하여 1980년 7월에 끝낸다. 1979년 4월부터 9월까지 요양원에 들어간 6개월 동안 연재는 중단되었다. 연재 때 제목은 《초가삼간 우리 집》이다.
1982년
(46살)
《새가정》 1월호부터 1987년 3월까지 《몽실 언니》를 연재했다. 인민군이 나오는 이야기가 문제가 되어 연재가 중단되었다가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재개되었다.
1983년
(47살)
가을, 빌배산 아래 빌뱅이 언덕 작은 오두막집으로 이사한다. 해질 무렵 빌뱅이 언덕에 올라 노을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1986년
(50살)
빌뱅이 언덕 집에서 3년 동안 석유 호롱불로 지내다가 전기가 들어왔을 때 “아직도 고무신과 호롱불이 생리적으로 제겐 어울린다는 진부한 생각을 합니다. 전기 불빛 아래에서 과연 동화가 씌어질 수 있을지 무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1995년
(59살)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로 새싹회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결졍됐다. 권정생은 “우리 아동문학이 과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상을 주고받습니까. 아동문학만이라도 상을 없애야 합니다.”하고 수상을 거절했으나 안동까지 가서 상을 주었다. 닷새 뒤 상금과 상패를 우편으로 되돌려 보냈다.
2003년
(67살)
<강아지똥>이 클레이 애니메이션(점토를 이용한 만화영화)으로 나왔다. 도쿄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파일럿 부분에서 ‘Doggy Poo’라는 이름으로 출품하여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2004년
(68살)
《녹색평론》에 <골프장 건설 반대 깃발이 내려지던 날>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마을에 폭력이 동원되고 인간성이 파괴되고 자연이 파괴되는’ 현실을 한탄했다.
2007년
(71살)
5월 17일 오후 2시 17분 대구 가톨릭대학병원에서 영면했다.
※이 연보는 원종찬 님의 편저 「권정생 문학과 삶」(<창비>.2008)에 실린 이기영 님의 글입니다. 이기영 님은 (사)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활동하였고, 지금은 똘배어린이문학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요청에 따라 복사, 재배포가 안 되는 점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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